습관처럼 지하철에 올라,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듭니다.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무심코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립니다. 친구의 소식을 훑다 보면 어느새 알고리즘이 이끄는 릴스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피식 웃음이 나는 영상을 친구에게 공유하고 나면, 다시 새로운 콘텐츠의 무한 스크롤이 시작됩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차창 밖으로 익숙한 한강이 펼쳐졌습니다. 매일 지나는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햇살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몇 외국인만이 저처럼 창밖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와 똑같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작은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얼마 전 영상에서 봤던 ‘도파민 중독’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심심하다’고 느낀 건
언제였을까?
어떤 결심이 선 듯,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저 멍하니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은 핸드폰 삼매경이고, 몇몇은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 지 10분쯤 지났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색함 속에서 ‘심심하다’는 생각이 툭, 하고 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더 큰 질문이 저를 덮쳤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심심하다’고 말했던 게 대체 언제였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스마트폰이 없던 15년 전쯤에는 ‘심심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별일 없이 친구에게 “심심하다”고 문자를 보내고, 싸이월드 다이어리에는 ‘지루함’을 토로하는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심심했기 때문에 괜히 친구를 불러냈고, 심심했기 때문에 목적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렸습니다. 심심했기 때문에 거실에 나가 가족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고, 심심했기 때문에 책장을 뒤적여 아무 책이나 펼쳐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심심함’은 저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습니다.
심심할 틈이 없는
시대의 공허함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심심할 틈’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손안의 작은 화면은 단 한순간의 지루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라고 하기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허전함이 느껴집니다.
의미 없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끝에는 늘 설명하기 힘든 공허함이 남습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보고 들었는데, 정작 머릿속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기묘한 상태. 어쩌면 우리는 심심함을 피하는 대신, 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할 시간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출퇴근 시간만큼이라도 의식적으로 핸드폰과 이어폰 없이 시간을 보내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면 유혹처럼 다시 핸드폰을 켜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심심함’의 순간에, 예전처럼 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어릴 적 그토록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넘쳐났던 건, 어쩌면 ‘심심함’이 주었던 소중한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실험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 실험에 대한 후기를 이곳에 남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